J 문학교실

아버지의 양금소리 수정본

웰리스1004 2019. 3. 28. 15:02

제목: 아버지의 양금소리

                                                                                                  유재희

한 여름 시골집 대청마루에는 뒤뜰에서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고 그 자리에 은은한 양금소리가 선율을 타며 울려 퍼진다.

취미로 아버지가 치시던 양금소리다.

한가한 시간이면 곱게 풀 먹인 하얀 모시로 지으신 바지저고리 입으시고 흥겨운 흥을 타시곤 했다.

아직도 그때 양금과 한 몸이 되어 음을 타시던 아버지 모습이 생생하다

양금은 우리나라 전통 현악기 중의 하나인데 서양에서 들여왔다 해서 서양금이라고도 하며 국악기 중에서는

유일하게 쇠줄을 가진 현악기라고 한다.

어릴 때는 그저 가야금보다 작은 양금, 미니 가야금 정도로 생각했고 훗날 사전에서

이 악기의 정확한 내용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께서는 이 악기를 어떻게 갖게 되셨는지 모르지만 멋지고 귀한 악기를 이미 연주하신

아버지 모습을 떠올리면 대단하시고 멋진 분이셨다.

이렇게 멋진 아버지께서는  생각도 상당히 진보적인 분이셨다. 바쁜 시골이지만 당신의 여가를 즐기실 줄 아셨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자신을 위해 바쁘다는 핑계로 뭐,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 ~

아버지께서는 읍내에 계신 기관장분들과 음악 동아리가 있었고 아버지는 거기서 양금을 치셨고

모두 국악기 하나씩 갖고 한 달에 한 번 모임을 갖고 연주하는 모임있었다

때로는 집에서 피리도 부르시고  장구도 치시고 그때는 몰랐는데 생각해보면 음악에 상당한 열정과

흥이 많으셨던 것 같다.

하루 중 바쁜 시간에도 시간을 내어 연주하시던 아버지의 양금소리가 은은하게 울리면 마음이 무척 즐겁고 좋았다


어린 시절 내가 태어나고 유년을 보낸 시골집은 300여 평이 되는 대지에 안채 사랑채가 자리하고

소가 있는 외양간과 닭장이 있었다. 외양간에는 농사일을 거두는 등치가 큰 암소가 있고

닭장엔 알을 넣는 암탉이 여러 마리 있었다.

넓은 뒤뜰엔 감나무, 대추나무, 앵두나무 포도나무가 한두 그루 씩 과실수가 있고 남은 여백의 터에

딸기도 심고 고추, 가지, 상추를 농사지어 한여름 우리 집 식탁은 직접 가꾼 채소와 과일로 늘 풍성한 식탁이 되었다

먹거리가 풍요로웠던 어린 시절 고향집이 마음속에 진한 그리움이 되어 남는다.

해 질 무렵 농사일로 하루 종일 땀 흘린 일꾼들이 들어오고 어머니는 직접 키우신 야채로 저녁을 지으신다

밥솥에 김이 오르고 솥뚜껑 열어 놓으면 밥이 다 된 솥 가장자리엔 오늘의 밥상에 올라갈

반찬들이 한가득 익어 있었다

가지도 찌고 밀가루 묻힌 애고추도 찌고, 호박잎도 쪄낸다.

모두 꺼내서 양념을 무치면 근사한 한식 요리상이 된다.

아버지께서는 유난히 식사가 까다로우셔서 반찬 가지 수가  항상 많았다.

늘 많은 식구들이 식사때는 넓은 대청마루에 한가득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농사일해주시는 아저씨들 부엌일 도와주는 아주머니네 식구들까지 대 식구가 아침저녁으로  우리집 대청마루는 잔칫집처럼 북적거렸다


하루 종일 분주했던 시골집도 저녁시간이 끝나고 어둠이 내리면 앞마당에 돗자리 깔고 누워 별 보며 먹던 야참 옥수수가 있다

그 맛을 생각하면 지금도 침이 고인다.

둥그렇게 둘러앉아서 하나씩 옥수수로 하모니카를 불듯이 잘 여문 알갱이, 쏙쏙 깨물면

옥수수가 순식간에 한 소쿠리 금방 바닥이 난다.

농사일로 북적 걸렸던 시골집 하루도 그렇게 끝이 난다.

모두 방으로 들어가고 한가해진 대청마루엔 아버지의 은은한 양금소리가 취침시간 알리듯이 리듬을 탄다.

낭랑한 소리 하루의 고단함을 가락으로 풀어내시던 아버지의 양금소리~

이렇게 멋진 아버지께서는 성격은 정적이셨고 인정도 사랑도 우리에게 많이 주신 것으로 보아

로맨틱하신 분으로 기억된다.

 그 당시 우리 집은 많은 토지를 갖고 있어 동네에서 부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동네분들 어려운 가정 돕기도 많이 하시고 늘~ 베풀고 사셨던 아버지의 삶이 어린마음에도 남에게 먹을 것을

줄 때가 제일 신났다.

농사를 하실 때 일하시는 분들 관리하시는 능력도 대단하셨다

일 도와주시는 머슴 두 분이 계셨고 때로는 많은 분들이 일을 하신다.

농사일이 한가한 농 한기엔 보너스로 일 년에 한번 여행도 보내 주셨고 보너스도 주고 근사한 옷도 사주셨다

힘들게 일하시는 직원들의 마음을 알아주셨던 아버지께선 지금으로 말하면 직원들 조직관리를 잘 하신 것으로 생각된다.


자식 교육에 있어서도 남보다 앞서신 교육관을 갖고 계셨다.

시골에 살면서 외아들에 대한 교육을 생각해 초등학교 2학년 때 서울로 유학을 보낼 정도로

교육도 진보적인 사고를 갖고 계셨다.

서울로 전학 시킬 때 학교가 있는 동네는  치안이 좋아야 한다며 대통령 사시는 청와대 옆 동네 청운동으로 전학을 시킬 정도로

치밀하고 큰 생각을 하셨다

청운동에 있는 청운 초등학교로 전학하였고 그 당시 대통령 자녀와 같은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인데 가끔 동생에게 보내는 식료품과 돈 심부름를 나에게 시키셨고 출발하기 전

교육을 단단히 받고 서울행 급행 버스에 올랐다.

참, 아버진 용감하셨던 것 같다. 5학년짜리 여자아이를 서울에 어떻게 혼자 심부름을 보낼 수 있으셨는지

지금 생각하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나는 똘똘하게 심부름을 잘 했다. 서울역 앞 세브란스빌딩 앞에 버스터미날이 있었다.

도착하면 알려 주신대로 세검정 가는 버스타고 중앙청을 지나 효자동에 내려 집도 잘 찿아갔다.

그 덕분에 나는 도전정신이 뛰어났고 남의 앞에서 내 생각을 당당히 전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었다

나에게 할 수 있다는 용기와 당당함을 주신  아버지,  덕분에  도전을 무서워하지 않고 성장했다

생각해 보면 엄청 겁이 많은 아이인데 아버지의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부족해도 인정하고

믿어 주는 힘이란,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는 큰 힘인 것을 어른이 되어 크게 깨달았다

아버지의 그 모든 것들이 훗날 직장에서 리더로서 일할 때 영향이 많았다.

조직관리도 뛰어나고 업무 평가도 잘 받아 일 을 했다.

덕분에 우수한 평가로 직장에서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어린 시절은 아버지이시니까 그랬을 거라고 생각했고 직장에서 일하며 능력을 인정받고 승진할 때는 이미 고인이 되신   아버지 생각을 많이 했다.

몸소 보여주신 아버지의 리더십이 나에게 큰 유산이 되었다는 걸 가슴 깊이 느꼈다

정의로움과 정직함을 강조하셨고 당당함을 알려 주신 분, 우리 아버지께선 보통의 어른은 아니셨다,

어른이 되어 나는 큰 나무로 커다란 그늘을 만들어 주신 아버지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그분의 일생의 삶을 많이 생각하며 살았다

.지금도 고향집 대청마루에서 은은하게 양금채로 양금을 치시는소리, 한음 한음 두드리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인다 

그 소리는 그리운 아버지의 숨소리가 되어 지금도 내 곁에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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